생명의 복음 사역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겪게 됩니다. 육신의 죽음은 비켜갈 수 없는 인간의 제한된 운명입니다. 잠언의 말씀은 초상집에서 지혜를 얻으라고 교훈 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들에게 육신의 죽음을 굴레로 남겨 주셨습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는 불로불사에 관심을 갖고 불로초를 구하러 서복이라는 사람을 한반도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여러 이단종교들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신천지 교인들은 영생불사를 믿습니다. 14만 4000명을 채우면 안 죽는다고 주장합니다. 만약에 교주가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단종교를 만들어냅니다.
플라톤은 철학의 다른 이름을 ‘죽음 연습’이라고 합니다. 사형수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머릿속으로 죽음을 시뮬레이션 한다고 합니다. 사형장을 떠날 때 남겨진 동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간수들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 지, 유언은 어떻게 할 지, 마지막 죽을 때 어떤 찬송가를 부를 지 등등을 계속 생각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준비한 사형수는 차분하게 사형장으로 간다고 합니다. 인간은 모두 사형수와 같이 죽음을 준비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철학은 죽음을 빼고는 현재의 삶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허무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잡한 일들을 끝낼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육신이 죽게 되면 땅에 묻혀 먼지로 사라지면서 이 세상의 모든 관심과 문제에서 초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겪지 않고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정신과 육신이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드시기도 하시고 만질 수도 있었지만 부활의 육체는 벽을 통과하고 시간을 초월해서 어디든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신비의 육신이었습니다. 신자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땅에 묻혀 있든지 먼지로 흩어지든지 예수님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 모든 신자의 육체가 다시 형성되고 영혼이 합쳐져 부활의 몸을 이룹니다. 죽음을 맞겠지만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시간을 살아갈 부활의 육체를 갖게 되고 영원한 시간을 살아갑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육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육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잠시 머물렀다가 옮겨가는 곳입니다. 안개와 같고 이슬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미련을 두면 허무주의, 염세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허무주의는 하나님, 구원, 진리를 통해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염세주의는 사람 사이에 갖는 친근감이 끊어질 때 발생하여 인간과 사회 자체에 반감과 불만을 갖습니다. 생명의 복음이 이 세상의 철학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복음을 알려줘야 합니다. 고립 속에서 나와 하나님을 믿고 신실한 교회에서 즐겁게 교제하며 구원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합니다. -CSJ-
Comments